크리소스톰 설교학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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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당하는자를 부르라!" (설교동영상과 설교문)
박희춘 목사  (Homepage) 2009-05-25 11:22:24, 조회 : 2,754, 추천 : 357
- SiteLink #2 : http://www.youtube.com/results?search_type=&search_query=richard+park+calling+a+man&aq=f
- Download #1 : 고난받는자를_부르라_박희춘목사_설교.hwp (61.0 KB), Download : 76
  Have no Movie Picture!!

2009년 5월 20일 마천중앙교회 저녁예배에서 한 설교 "고난당하는자를 부르라!"입니다.
위의 링크(Link)를 클릭하시면 다섯개의 파일이 뜹니다. 번호대로 클릭하시면
이어서 설교를 들으실수 있습니다. 유투브가 10분까지 업로드를 허용하기때문에
다섯개로 나누어 올렸습니다. 다음은 설교문입니다. 다운로드하여 읽으실수도 있습니다!

                                                                        
                       "고난 당하는 자를 부르라!"

                               박희춘목사                                            

                               요한 9:1-3
예수께서 길 가실때에 날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이오니이까. 예수껫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사야 63:7-9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 찬송을 말하며 그 긍휼을 따라 그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지난 1986년부터 현재까지 마천중앙교회 박목사님과 장로님들 그리고 성도님들이 저에게 보여주신 사랑과 은혜 그리고 기도는 이루 말로 표현할수없을 만큼 크고 깊고 넓습니다.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번에 3년만에 한국에 다시 들어와서 조윤희집사의 죽음 소식을 우연히 접했습니다. 옛날 화요찬양모임에서 말없이 언제나 일찍 나와 악보를 준비하고 늘 성실히 주님을 함께 섬겼던 귀한 자매가 어린 두 자녀와 남편을 뒤로하고 암으로 세상을 떠나다니! 한동안 너무 충격적이어서 말을 잃었습니다. 주님 나라에서 영생하며 안식하고 세상의 아픔을 잊고 기쁨으로 주님만을 경배하는 딸이 된줄로 믿습니다. 세상에는 참 슬프고 아픈 일들, 고난이 많습니다.

저 자신을 붙들어주었던 고난에 대한 몇가지 잠언을 소개합니다. “Pain is synonymous with spirituality. When you're in the most pain, you're closest to God." 번역하면 “고난은 영성과 동의어이다. 당신이 가장 극심한 고난에 있을때 혹 고통가운데 있을때 당신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다.” 이 잠언은 하나님이 극심한 고난가운에 계신 하나님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극심한 고통과 고난가운데 있을때 고난가운데 계신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을 만날수있는 특권의 기회라는 것이고 그래서 그 고난은 우리를 깊은 영성으로 인도해주는 기회라는것입니다.

“The nightingale sing its sweetest when the night is darkest." "나이팅게일은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가장 밤이 깊을때 부른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고난이 밤이 가장 깊을때 우리는 나이팅게일처러 우리 삶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수있다는것입니다. 여러분, 동의하십니까? 돌이켜보면 우리 인생의 가장 깊은 어둠의 고난의 때 나의 영혼이 하나님앞에 가장 아름다웠던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The gem cannot be polished without friction, nor man perfected without trial.” “보석이 마찰없이는 빛날수 없듯이 사람도 시련없이는 완성될수없다.” 는것입니다. 우리 삶의 시련이 오히려 우리를 다듬어 더욱 빛나는 하나님앞에서의 값진 보석으로 만드는 아픈 축복이라는것입니다.

저에게 고난의 폭풍이 다가왔을때에 한 외국친구가 이런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Who knows that this would be a blessing in disguise for you?" "누가 알겠니 이 시련이 너에게 위장된/감추인 축복일지를, 친구야” 고난이 당시에는 아프고 힘들지만 결국에는 아픈 시련과 고난이 위장된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의하십니까? 헬렌켈러가 한 말을 기억합니다. “We could never learn to be brave and patient if there were only joy in the world.” “이 세상에 오직 기쁨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결코 용감하거나 인내의 사람이 되기를 배울수 없다.”

오늘 성서본문 요한복음 9장1절에는 “날때부터 소경”된자를 예수님께서 “길가실때에” 발견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의 인생길 걸어갈 때, 우리의 인생의 길가에 수많은 절망하고, 아파하고, 고난으로 인해 낙심하는 영혼들이 널려있습니다. 이기적으로 나만 예수님 믿고 축복받으면 된다하며 우리 인생 길가에 널려있는 고통속에 절망하는 형제와 자매들의 영혼을 보지 못해서는 안됩니다. “보신지라” 예수님이 보신것을 우리도 볼수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누가 지금 내 주변, 나의 걸어가는 인생길가에서 환난과 고난속에 아파하고 흐느끼고 있는지, 누가 예수님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지, 누가 예수님의 만져주심이 필요한지, 누가 “실로암”의 능력의 치유와 변화가 필요한지, 그것을 볼수있는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저녁 우리 모두의 영안을 열어 상한 영혼, 고통받는 영혼, 주님이 간절히 필요한 영혼들을 볼수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자신의 힘의 한계를 느끼고 이젠 주님이 하시기를 기다리는 영혼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9:3도 말씀하시기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라고 합니다. 우리 마천중앙교회 박보범목사님이 늘 말씀하시듯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그들이 고백할수있도록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할수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손을 잡고 “자, 친구야, 이젠 그만, 예수님께로 나아가자. 너를 기다리셔. 두손 두 팔 벌리시고 너를 간절히 기다리셔. 너를 도와주시려고.” “나면서부터”라는 말씀은 거의 절망적으로 들립니다. 희망도 없고 믿음도 없고 거의 포기하게 만드는 비관의 표현입니다. 일 이년도 아니고 나면서부터” 그러나 우리 주님께 불가능은 없습니다. 우리 대신 우리 받을 고난, 우리 받을 죄와 저주의 형벌을 대신 십자가에서 지시고 죽으신 예수님, 그 분이 우리의 저주와 고난을 다 짊어지셨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저주와 고난을 이미 예수님께서 이천년전에 자신이 다 짊어지셨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 사실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받는 저주와 고난을 가져가십니다. 자신의 십자가로 옮겨가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장 절망적인 저주와 고난인 죽음을 이기시고 극복하시고 부활하신것처럼 우리의 절망적인 삶의 고난과 아픔을 극복하고 이길수있는 부활의 능력을 주실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자들은 부활의 능력이 강같이 흘러갈 수 있습니다.

고난은 사실 논리적으로도 “위장된 축복”인 이유는 인간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아픔이기에, 그 형태는 질병, 사업등 원하는 일들의 실패, 가정의 여러 문제, 죽음, 불의의 사고, 자연재해 등으로 다양해도, 결국 이러한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신이 아니고 인간이라는 사실, 모든 것을 다 할수있는분은 우리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제한적인 존재로 우리 힘으로 할 수 없고 통제할수없는 일들이 우리 인생에 많다는 사실을 겸손히 받아들이게 하는, 그래서 전능하신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앞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앞으로, 위로와 능력의 성령님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위장된 축복”인것입니다. 저는 저의 개인적인 고난이후 기도가 바뀌었습니다. 이전에는 무엇이든 제가 원하는것을 주시고 제가 원하는것을 주님이 주시기를 기도했지만 고난후 저는 이렇게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제가 바꿀수 없는것들을 받아들일수있게 하옵소서! To accept things that I cannot change!"

이러한 이유로 전도의 필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형태와 종류는 달라도, 거의 모두, 아니, 모두다, 각기 제나름대로의 고난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절망의 눈물을 닦아주실 사랑의 하나님, 위로의 성령님, 참고 이기고 극복하게 하시는 부활의 예수님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인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중에 있는 자들은 어찌보면 추수할때가 다 된 준비된 영혼들입니다. 살짝만 건드려도 금새 눈물이 주르륵 흐르며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 고난과 부활의 예수님, 위로의 성령님을 영접할 사람들입니다. 주께로 돌아올 준비가 다 된채 누군가 “하나님의 중매장이” “왕같은 제사장”을 기다리는 영혼들입니다.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영안이 열려서 “와서 도우라”는 그들의 영혼의 절규를 들을수 있도록!

요한복음 9장 2절 본문에는 또 다시 그러면 그 사람이 나면서부터 소경되고 구걸하는 거지로서의 평생의 삶을 산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라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자기의 죄이오니이까 혹 부모의 죄이오니이까?” 참 상처되는 아픈 질문들이고 정죄입니다. 우리의 삶에 고통과 고난은 우리나 우리 부모의 죄때문이라는 신학적 논리입니다. 욥의 세친구들이 고난받는 욥에게와서 “너 빨리 회개해. 너의 숨겨진 죄 때문에 너의 고난이 온것이야”라고 외칠때 욥의 고난은 가중되었습니다. "나쁜일들이 좋은 사람들에게 발생할 때(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라는 책은 미국 보스톤의 유대교 랍비 Harold S. Kushner에 의해 쓰여진 책으로 전세계 각 나라말로 번역되고 4백만부가 팔린 고난에 대한 깊은 통찰을 주는 책입니다. 큐쉬너 자신의 아들이 빨리 늙는 병에 걸려서 1 미터이상 자라지 못하고 10살도 안되어 힌머리가 나고 곧 머리가 다 빠지고 십대초반에 죽게됩니다. 도대체 누구의 죄 때문에, 왜, 하나님이 계시다면 죄없는 나의 아들에게 이런 시련이 왔는가? 도대체 고난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들은 옳은것인가? 질문하며 쓴 책입니다. 그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하루는 큐쉬너에게 한 유대인 부부가 상담을 요청합니다. 그들은 어느날 갑자기 멀리 대학을 가있는딸의 급작스런 죽음의 소식을 접합니다. 미처 손도 쓸 틈도 없이 갑자기 고통을 호소하던 딸은 응급실로 실려가던중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부부는 말합니다. 저희가 작년 욤키푸르, 즉 유대인들의 일년에 한번씩 하는 금식을 지키지 않아서 자신들의 딸이 하나님의 벌로 죽은것 같다고 자신들을 자학합니다.

그리고 또 한 이야기는 어느 십대가 눈이 안좋아져서 안과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한참후 다시 신기하게 시력이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다시 병원에 올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날부터 다시 시력이 나빠졌습니다. 이 십대는 자신의 상태를 자학하고 우울증에 빠지더니 얼마후엔 그만 자실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기전에 남긴 편지에는 이런고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내 눈을 다시 잘 볼수있해 주셨는데 나는 어느날 친구들과 성인잡지 Playboy를 보았다. 그후 내 눈은 다시 하나님의 벌로 나빠졌다. 나는 하나님께 벌받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존재이므로 더 이상 이 세상을 살 가치가 없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것이 자신의 죄인가요 아니면 부모의 죄때문인가요라고 물으며 원인과 결과라는 신학논리를 가지고 그 소경된자와 그의 부모의 가슴에 또 한번 가중된 못을 박은것처럼. 이러한 원인과 결과라는 신학적 논리는 “종교 religion"에서 온것이지 “복음”에서 온것이 아닙니다. 독일의 신학자이며 나찌 히틀러에 대항하고 지하신학교를 세우고 설교학교수였던 본회퍼의 “윤리학”에는 창세기 3장에 대한 본회퍼의 신학해설이 나옵니다.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 왜 히틀러가 6백만의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악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하면 본회퍼는 창세기 3장에서 그 해답을 발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고난과 환난, 많은 불의와 악, 그리고 자연재해를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고 하나님을 비난합니다. 우리도 너무 쉽게 우리 삶에 고난이 오면, 바로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라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을 손가락질 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 대한 본회퍼의 해석은 다릅니다. 모든 불의와 악, 그리고 고난의 책임은 우리 인간자신에 있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저주에 떨어졌을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신 것처럼 우리를 치유, 구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인간이 자유의 존재로 만드셨으며 동산안에 선악과를 제외한 모든 과일을 자유선택으로 따먹을수 있게 노예가 아닌 자유 존재로 인간을 원래 만드셨고 후에 인간이 선악과를 불순종으로 따먹음으로 이젠 선악까지도 스스로 선택하고 행할수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 비록 악을 선택하고 형제에게 악을 행해도 바로 그 순간 그것을 막지 않으십니다. 우리 생각에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악을 행하는것을 하나님이 다 막아주셔서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창조질서를 위배하는 생각입니다. 더 어려운 질문은 그 악을 행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또 바로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참아 기다리시며 자비와 긍휼로 돌아설때를 기다리신다는것입니다. 여기에 이중적 난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없는 일반 타 종교의 신이해는 여기까지입니다. 신이 존재한다. 그 신은 선한자를 상주고 악한자를 벌준다. 아주 단순한 신학적 사고입니다. 쉬운 사고입니다. 그래서 본회퍼는 복음적 그리스도인은 비종교화해야한다고 말하는것입니다. 이런 종교의 하나님이해와는 달리 복음의 하나님이해는 아주 다릅니다. 복음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죄없으신 분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게 하시고 우리의 영생을 위해 다시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종교는 이 복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종교는 이 복음과 상치됩니다.
복음의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과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악한자를 당장 잔인하게 벌하시는 분이 아니고 오래 기다리시고 우리가 회개할 때 용서하시고 자비로 받아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의 하나님을 불신자들에게, 그리고 고난받는 자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악한자를 벌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우리의 고난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벌이요 심판이요 그 이유는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기때문이라는 잘못된 종교의 사고로 이중적 아픔을 당하는 고난받는 형제들에게 복음의 하나님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고난이 하나님께로부터 온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이 세상의 고난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본회퍼나 랍비 큐슈너나 그리고 많은 고난에 대한 책을 쓰고 고민한 사람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그리고 제자신의 사색과 경험으로 종합하면, 고난은 사람들에게서 옵니다. 처음 인간이 타락한것 그래서 땅이 저주를 받고 그후 피조물이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것입니다. 자연에서 오는 고난도 사실은 인간의 타락에서 비롯된것입니다. 지진이나, 홍수, 쯔나미, 토네이도, 폭풍등 인간의 타락으로 저주가운데 들어간 자연으로부터 고난이 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오는 고난역시 처음 인간이 타락하여 선악을 알게 되고 악도 자유로게 선택하고 행할수있게 됨으로써 다른 형제 인간들에게 악을 행하는것도 인간이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시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가슴아파하시고 우리의 고난에 슬퍼하시고 고난에 동참하시고 우리를 구원할길을 내시는 하나님이신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이 올때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한가지 더 추가한다면 욥기에 나오는것처럼 사탄입니다. 사탄 곧 마귀가 베드로전서 5:8에 나오듯이 우는 사자같이 두루다니며 삼킬자를 찾기때문입니다. 계시록 2:10에도 그래서 말씀하기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가운데서 몇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고난을) 받게 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고난이 올때 절대로 하나님을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기위해 잠간의 시련을 보내시기도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 사랑의 연단이지 환난이나 고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구약 이사야 63:7-9 본문에도 하나님을 자비와 긍휼과 은총의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 찬송을 말하며, 그 긍휼을 따라, 그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이사야 63:7) 계속하여 이사야 본문은 복음의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과 은혜의 하나님이실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복음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시는”(이사야 63:9) 하나님으로 정의합니다. 영어성경번역에는 “when they suffered, he suffered with them" 아주 강력한 번역입니다. 우리 개역성경은 약간 번역이 불분명합니다. 9절에서 문장이 끝나도록 번역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고난받을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고난받으셨다” 저는 영어성경으로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여러차례 읽으며 깜짝 놀랐습니다. 신구약 전체 성경중에 이렇게 직접 하나님을 우리와 함께 고난받으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한곳이 여기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말을할 때 여기밖에라는 표현은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데서 한군데라도 나오면 틀린표현이기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있게 말할수 있습니다. 왜냐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고난이라는 주제로 여러차례 영어성경을 집중적으로 반복해서 밑줄그으며 읽고있었기에 이 본문 이사야 63:9은 오직 한곳 하나님을 우리와 함께 우리의 고난을 받으시는분으로 표현한 유일한 곳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Footprint" "발자국”이라는 고난에 대한 시를 아실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받고 천국에 갔는데 주님께서 그의 인생길을 바닷가의 두 발자국, 하나는 그의 발자국, 하나는 주님의 발자국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의 가장 어려운 고난의 때에는 주님이 떠나시고 자신 혼자서 인생을 걸어간것 처럼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발자국이 한사람것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불평했습니다. “왜 제인생의 쉬울때엔 함께 하시더니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고난의 때엔 저를 버리셨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얘야, 그게 아니다. 왜 내가 너를 버렸겠니. 너가 가장 깊은 고난을 받을때 그 발자국은 나의 것이다. 내가 너를 내 등에 업고 갔기 때문이다.”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의 유명한 책의 제목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입니다. 저는 가끔 그 제목을 생각합니다. 우리 삶에 십자가의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은 직접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하나님을 고난받는 자들에게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당하는자들을 부르라!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저들과 함께, 저들을 등에 업고, 저들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저들을 사랑한다. 주님을 모르고 혼자서 고난앞에 절규하는 불신자들과 형제자매들을 주님께로, 교회로 부르십시오.

직접적인 표현이 아니고 간접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고난에 함께 하시는 표현이 다른 성서구절들에 나옵니다. 예를 들면, 같은 이사야 43:2 “네가 물가운데로 지날때에 내가 함께 할것이라” 고난을 물로 표현하는것은 고난을 당해보신분들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물에 들어가면 우리 마음대로 쉽게 몸을 움직일수 없습니다. 통제능력을 상실하고 물에 나를 맡기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길에 때때로 우리가 통제할수없는 인생의 바람과 파도가 붑니다. 너무 강해서 내가 통제할 수 없고 통제를 포기하고 드디어는 그 바람과 파도가 부는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항구라 어딘지는 몰라고 내가 가고싶은 목적지를 잊고 포기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아브라함처럼 갈바를 알지못하지만 순종하고 떠나는 사람이 됩니다.

신약성서 히브리서 4:15-16에 예수님을 표현하기를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개역번역을 약간 달리 번역하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고난을 모른채 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고난을 받은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이것이 우리가 전할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우리가 겪는 모든 고난을 대신 겪으시고 우리를 은혜로 돕기위해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문밖에 서서...고난으로 눈물흘리고있는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시고 기다리시는 예수님. 형제여 자매여, 이 예수님께로 나아오세요. 예수님이 당신의 고난을 돕기 위해 긍휼하심으로 기다리십니다. 예수님없이 혼자 고난의 짐을 지고 가지 마세요.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베드로전서 2:9-10에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이제 주님이 여러분을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십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만인제사장”설을 내세웠습니다. 우리는 모두 -평신도 혹 목회자- 상관없이 “왕같은 제사장”으로 한손에는 하나님의 손을 잡고 한손에는 고난받는 형제자매들의 손을 잡고 하나님의 중매장이, 천국의 중매장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때 이미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고난받는 형제와 자매들을 위해 중보기도할 때 이미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인것입니다. “왕”같은...이 얼마나 위대한 특권입니까? 고난당하는자들을 부르라! 주님 명령받들어 고난당하는자들을 찾아 나섭시다. 눈물흘리는 자들과 함께 울고, 그들곁에 서서 그들을 지탱해주며 함께 십자가로 절뚝이며 느린 걸음으로라도 나아옵시다.

혹 여러분의 삶이 지금 고난중에 있습니까? 내 아픔이 너무 커서 남의 아픔을 돌아볼 정황이 없습니까? 사랑의 신비중에 하나는 세상에는 늘 나보다 더, 아무리 우리가 극심한 고난을 받는것 같아도, 내 고난이 가장 고통스러운것 같아도 언제나 나의 고난보다 더 심한 고난을 받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보다 더 심한 고난을 받는 이들을 찾아가서 섬기면 신기하게도 어느새 나의 고난은 작아지고 나의 고통은 경감됩니다. 아니, 오히려 기쁨이 샘솟고 치유의 강물이 흐릅니다. 삶의 용기도 생깁니다.

저는 지난 3년중 미국 샌프란시스코 Night Ministry에서 처음에는 assistant night minister로 6개월 그리고 후에는 1964년 샌프란시스코 Night Ministry가 생긴이해 처음 전임 associate night minister로 매일밤 10부터 새벽 5시까지 밤거리를 걸으며 노숙자를 비롯한 많은 밤의 사람들을 돕는 사역을 해왔습니다. 이 사역은 1964년에 창설되어 샌프란시스코지역의 장로교, 루터교, 카톨릭, 성공회, 회중교회등이 연합하여 밤시간에 길거리로 영혼들을 찾아가 섬기는 사역입니다. 저희는 저희를 보호하는 차원 그리고 우리가 Night Minister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상징적으로 알리는 차원에서 검은 양복과 클러지 셔츠를 항상 입고 사역합니다. 하루 저녁은 한 백인이 시청앞 어둔 길목에서 저에게 고해성사를 할수있는지 물었습니다. 대개 사람이 죽기전에, 자살하기전 고해성사를 하기를 원합니다. 그 상황을 감지하고 상담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은 뉴올리안즈에서 왔는데 태풍 카트리나때 부인과 자식들이 익사했고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노숙자가 되고 이젠 자살을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를 회복시켰습니다.

또 한번은 샌프란시스코의 밤거리를 걷는데 갑자기 한국말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떤 놈이 날 건드려!” 깜짝 놀라서 제 귀를 의심하며 도대체 누가 이시간 이 미국의 밤거리에서 한국말을 하나 주변을 살펴보았더니 길 건너편에 한국인 할머니하나가 줄담배를 피며 흑인여자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영어가 안되지만 한국말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어떤 놈이 날 건드려!” 후에 피자도 사드리고 대화를 몇 번 했습니다. 그리고 한번은 그레이하운드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신문지를 덮고 잠을 자는 한국인 중년남자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추위를 이기기위해 밤새 시내 끝에서 끝까지 걷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치면 맨땅바닥에서 신문을 덮고 잠을 자고 아침엔 식당일을 나간다고 했습니다. 잠을 제대로 자지못하고 피곤해서 식당에서 일을 할때 너무 피곤해보여 주인이 그나마 해고할까봐 두렵다고 했습니다. 그를 값싼 유스호스텔로 데려가 편하고 따뜻하게 재워준적도 있습니다. 또 한번은 아버지가 백인이고 어머니가 한국인인 청년이 흑인 다섯명에서 길에서 몰매를 맞는것을 말려준적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불과 제 사역중 불과 몇이야기입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와서 이강선부목사님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얼마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한 자매가 죽기전에 자신이 모은 돈을 자신보다 더 어려운 다른 고난받는 형제 자매를 위해 써달라고 내놓았다는 것입니다.

헬렌켈러는 눈이 멀고 귀가 들리지 않는 극심한 장애의 고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헬렌켈러의 전기를 영어로 읽어나가는중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의 고난도 충분히 동정받기 합당하고 남을 생각할수 없는 정당화를 할수 있음에도 헬렌은 필라델피아 어느 시골의 나면서부터 눈멀고 귀멀고 부모가 내어버린 남자 아이를 돕는 모금운동을 펼칩니다. 눈멀고 귀멀고 부모가 내어버린 그 아이가 헬렌 자신처럼 교육받을수 있도록 그 아이를 위해 순회모금을 합니다. 나보다 더 심한 고난받는 이웃을 찾아가는것은 오히려 나의 고난을 작아지게 하고 없어지게 하고 고난중에도 기뻐하고 감사하고 즐거워하게 해줍니다.

제가 고난받는 사람들을 관찰한 바에 의하면 우리의 삶에 고난이 올때 다 고난을 극복하고 승화시키고 이기고 고난의 유익을 발견하는것이 아닙니다. 절반이상이 고난이 올때 못이기고 넘어지고 포기하고 고난극복에 재차 실패합니다. 실패의 첫 고난에 극복실패의 둘째고난의 무게에 삶을 끝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고난에 반응하는 세가지 유형을 발견하는데 첫째는 고난이 올때 화를 내고 파괴적으로 폭력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입니다. 고난이 그들에게는 위장된 축복이 아니고 드러난 저주입니다. 고난 때문에 서로 원망하고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며 폭력적 파괴적 행위를 거침없이 합니다. 둘째 부류는 고난앞에 스스로 무너져서 슬퍼하고 우울해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원망합니다. 자신에게 잘못을 돌리고 자신을 포기합니다. 스트레스로 받고 심하면 정신질활까지 갑니다. 셋째는 웃는 사람들입니다. 바보같이 보입니다. 웃을 수 없는 상황, 그들의 고난을 우리가 아는 감사하고 웃고 찬양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속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고난을 극복할 부활의 능력을 예수님께 받고 위로의 성령이 그들의 영혼에 임하시기 때문에 슬픈데 슬프지않고 삼위일체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믿음을 받습니다. 그리고 소망을 공급받습니다. 믿음을 잃을 상황인데도 여전히 믿음이 충만합니다. 절망의 상황인데도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고난당하는 자를 부르라!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왜냐면 세상에는 너무나 고난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준비된 영혼들입니다. 그들에게 가서 전하십시오. 그들의 고난에 대한 하나님이 계획이 있으심을. 하나님은 그들 한 사람 한사람의 아픈 고난에 대한 사랑의 계획이 있으십니다. 다만 그들이 모를뿐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이 되어 그들이 예수님께돌아오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들에게 고난의 비밀을 전파하십시오.

고난은 위장된 축복입니다. 당신의 고난에 주님이 동참하십니다. 당신이 당하는 그 고난을 주님이 함께 당하시며 당신과 동행하십시다. 주님없이 혼자서 무거운 짐을 지고 포기하지 말고 주님께로 교회로 나오십시오. 당신이 주님께로 고난의 짐을 지고 주님께로 나아올때 주님은 당신에게 몇가지 고난의 유익을 주실것입니다. 첫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고 구세주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며 위로의 성령의 부으심을 받습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저는 주님이 필요합니다라고 더 겸손히 솔직히(more humble and more honest) 하나님앞에 고백하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와 더 가까이(closer) 계시고 싶으실 때 우리가 세상을 잊고 주님께만 향하도록 가까이 나아오도록 우리를 고난을 통해 부르십니다. 셋째, 고난을 통해 당신삶의 지금껏 당신이 발견치 못했던 더 높으신(higher)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사야 55:8-9에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주님은 당신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높으신 뜻을 발견하기를 원하십니다.

넷째, 고난을 통해 당신은 주님앞에서 더욱 강한(stronger) 사람이 될수 있습니다. 고난전과 고난이후의 당신은 현격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바울이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12:7-10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것들(고난)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이는 내가 약할그때에 곧 강함이라.” 할렐루야! 다섯째 고난을 통해 당신의 삶은 더욱 순수해지고 정결해집니다. 고난이전에 혼돈과 세상으로부터 오염되었다면 고난이후에는 세상으로부터 자유해지고 하늘을 향해 열리게 되고 더 순수하게(purer) 됩니다. 그래서 욥은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후(나의 고난이후)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이렇게 전파하십시오. 고난당하는자를 부르라! 주님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가 “왕같은 제사장”이 되어 우리의 인생길가의 고난받는자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을 통해 수많은 아파하고 눈물흘리는 고난받는 불쌍한....너무나 너무나 불쌍한 영혼들을 위로하고 구원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40:1 주님이 명령하십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아멘!

<기도>
다같이 기도합시다. 이시간 다같이 결단합시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가진것으로는 저 불쌍한 영혼들을 위로하고 고난에서 구원할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영안을 열어주셔야 저들의 영혼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주셔야 사랑으로 그 하나님을, 그 예수님을, 그 성령님을 보일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저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저를 써주시고 왕같은 제사장이되도록 능력을 부어주시면 저는 할수 있습니다. 이시간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거지같은 크리스찬이 아니고 왕같은 제사장이 되어 한손에 하나님 다른 한손에 고난받는 형제를 붙들고 천국의 중매장이가 되기를 원하시는 분은 두손을 높이 들고 주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제 눈을 열어주옵소서, 제 입을 열어주옵소서, 제 발걸음을 자유케 하옵소서. 하나님의 중매장이, 왕같은 제사장이 되도록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옵소서. 추수할때가된 예비된 영혼들, 고난중에 있는 영혼들을 감지할수 있는 영안을 열어주옵소서. 내 고난이 큰것같아도 잠시 내 고난의 아픔을 잊고 고난받는 형제의 아픔에 동참하게 하옵소서. 고난받는자를 부르라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온 몸에 물과 피를 흘리시며 우리 고난대신지신 주님의 절규를 듣게 하옵소서. 다같이 주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며 기도합시다. 주여! 역사하소서! 오순절 성령이여 역사하소서! 함께 기도합시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써주시옵소서. 나의 몸 나의 맘 주께 드리오니 저희를 받아주옵소서. 온 세상이 고난으로 아파합니다. 그들의 아픔의 소리, 눈물을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 저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써주옵소서. 저희와 저희 마천중앙교회가 고난받는 불쌍한 수많은 영혼들을 위로하고 구원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교회가 교회자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고 세상에서 절망하며 고난받는 영혼들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고난이 축복이 됨을 그들의 깨닫고 고백할 때까지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을 자원하는 저희가 되게 하소서. 내 고난에 파묻히지 않고 형제와 자매의 고난에 동참하게 하오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09년 5월 24일/마천중앙교회/주일저녁예배








     

  
26  박희춘 소장 독일어 설교 동영상 (Youtube)    박희춘 목사 2013/09/16 172 1092
25  박희춘소장 스페인어 설교와 성찬식인도 동영상 (멕시칼리 Mexicali)    박희춘 목사 2010/04/24 336 2573
24  스페인어 설교 (산크리스토발 San Cristobal)    박희춘 목사 2009/10/25 340 2731
23  "성령과 함께 고난을 이기라!" (구미시민교회설교)    박희춘 목사 2009/07/08 346 2747
22  "고난을 승리로!" (마천중앙교회 금요찬양예배설교 동영상)    박희춘 목사 2009/06/25 344 2296
21  "눈물로 씨를 뿌려야 하는 이유" (설교동영상과 설교문)    박희춘 목사 2009/06/23 344 2685
20  샌프란시스코 Night Ministry 동영상    박희춘 목사 2009/06/16 336 2133
 "고난당하는자를 부르라!" (설교동영상과 설교문)    박희춘 목사 2009/05/25 357 2754
18  박희춘소장 영어설교 (San Jose Lutheran Church)    박희춘 목사 2008/03/01 411 4430
17  북미 설교학회 연례발표 설교학 논문들 1999년    박희춘 목사 2007/05/02 413 2846
16  북미 설교학회 연례발표 설교학 논문들 2000년    박희춘 목사 2007/05/02 398 3454
15  북미 설교학회 연례발표 설교학 논문들 2001년    박희춘 목사 2007/05/02 387 2308
14  북미 설교학회 연례발표 설교학 논문들 2002년    박희춘 목사 2007/05/02 391 2299
13  북미 설교학회 연례발표 설교학 논문들 2003년    박희춘 목사 2007/05/02 405 2380
12  북미 설교학회 연례발표 설교학 논문들 2004년    박희춘 목사 2007/05/02 410 2282
11  북미 설교학회 연례발표 설교학 논문들 2005년    박희춘 목사 2007/05/02 395 3970
10  수지광성교회 설교/ "하나님이 세상을!"    박희춘 목사 2007/03/22 393 3068
9  마천중앙교회/고난주간 주일예배설교(전통예배)    박희춘 목사 2007/03/22 362 2424
8  마천중앙교회/ 고난주간예배설교(현대예배)    박희춘 목사 2007/03/22 338 3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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